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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여자로 사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었군요,

우리는 주말을 원한다 2024. 1. 1. 01:17

(1)

나는 여자가 되었다.

“XX 염색체가 확실합니다.”

의사의 선언을 끝으로, 나의 남성성에 관한 주장은 완전히 기각되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나는 융통성 많은 성격이라 신체에 대한 변화쯤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앉는 거쯤이야 어렵지 않잖아?

하지만 나를 제일 힘들게 하는 것은 사회적인 변화였다.

나는 제일 먼저 화장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이건 정말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10분이면 끝날 준비를 나는 적어도 한 시간 전에는 해야 했으니까.

남자일 때는 ‘그까짓 거 대충 하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했었지만, 역시 사회적인 시선은 무섭다.

나는 사람들의 눈빛만으로도 ‘오늘은 화장을 안 하고 왔군.’이라는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조차도 그랬다. 화장이 잘 되는 날은 자신감이 붙었다. 확실히 이뻐지니까 어쩔 수 없더라.

하지만 그 ‘힘듦’은 이제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2)

여자가 되었어도 돈은 벌어야 했다. 하지만 휴직 복귀 후 일주일 뒤, 나는 사표를 쓰게 되었다.

남자들의 찝쩍거림 때문에.

단순 플러팅 수준이면 속으로 욕하고 끝내겠는데, 신체적인 터치도 당한다는 것이 진짜 사람을 돌게 했다.

내가 남자였어서 그런지, 그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내게 접근했다.

‘이 대리 오늘 한잔 어때?’ 하면서 어깨동무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엉덩이를 툭 치고 지나가기도 했다!

그들이 그럴 때마다 공포영화를 보는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쫙 올라왔다.

그들은 내가 남자였다는 사실도 신경 쓰이지 않나 보다. 어떻게 그 나이를 먹고도 아랫도리에 행동이 좌우되는 거지?

그러니 그들이 가끔 나를 신경 쓰는 척, 힘든 일에서 배제하는 것도 결코 좋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나는 사표를 내지는 못했다. 여기서 도망가면 나락으로 떨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나는 평소 친하게 직장동료와 한잔 술로 힘든 것들을 털어낼 수밖에 없었다.

(3)

실수했다. [ ] 나는 걸레년이 되었다.

서로 다른 두 문장 [ ] 사이에는 많다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첫째로, 나는 직장동료와 잤다.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나에게 묻지 마라. 술이 원수라는 말밖에는 못 하겠으니까.

둘째로, 그 일이 어떻게 퍼진 건지는 모르겠는데, 사무실에서 나는 어느새 ‘걸레년’이 되어 있었다.

그 얘기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 나는 두 귀를 의심했다.

아니, 성인이 되어서 자기 신체에 대해 남들의 허락까지 받아야 하나?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남자의 기준일 뿐이었다. 여자는 사회 통념상 조신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적 처벌이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도 없어서, 나는 그 소문을 퍼뜨린 당사자를 잡아서 족치려 했다.

그리고 그 범인은 안 봐도 뻔하다.

분명 같이 잤던 직장동료 새끼가 무용담처럼 나와의 일을 떠벌리고 다녔겠지.

(4)

“그 입 좀 다물지?”

소문의 진원지를 파악하던 나는, 우연히 직장동료 A군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다른 여직원들과 얘기 중이었다.

화제의 중심은 ‘나’였다. 더 정확히는 내가 했던 짓에 대해.

그런데 이상하게도 A군은 나를 변호하고 있었다. 오히려 여직원들이 나에게 예의 그 타이틀을 붙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몰래 들었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직장 동료 중에 우리가 모텔에 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어서 그(그녀)는 그것을 사내에 소문을 퍼뜨렸다.

거기서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문제는 A군의 특수성에 있었다.

A군은 평소에도 능력과, 배경, 성격과 외모 등을 다 갖춘 덕분에 남신 그자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그를 좋아하는 여자들도 많았다.

그런데 누가 가지나 내기하고 있던 와중, 갑자기 내가 나타나 그를 채간(?) 것이다. 당연히 그들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그래서 그들은 나를 밑바닥에 처박으려 했던 것이다.

(5)

나는 여직원들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들은 여자로서의 삶에 공감해 주며, 같이 울고 웃고 해주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언니, 동생이라 부르며 정말로 친자매처럼 여겼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자신의 알량한 이익 앞에서는 친구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건가?

아니면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 뿐으로, 그들은 그저 나를 재밌는 장난감으로 여겼던 건가?

나는 순진했던 나 자신을 반성했다. 그리고 A군을 의심했던 것에 대해서는 미안함을 느꼈다.

다행스럽게도 사건의 당사자인 A군이 적극적으로 나를 대변해 준 덕분에, 직장에서의 나의 평판은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지난날의 ‘실수’로 인하여 그와는 관계가 조금 소원해졌지만 어쨌든 감사 인사는 해야겠지.

나는 평소 A군과 친분이 있었던 덕분에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좋아할 만한 조그만 선물을 준비해서 그에게 주었다.

그것이 나비효과처럼 일을 크게 만들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6)

조그만 선물이라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하기 쉽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놈의 베어브릭 한정판을 구하기 위하여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금수저였던 A군이 쉽게 살 수 있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기에, 이런 한정판 같은 것만이 그에게 유일하게 먹히는 선물이었다.

차가워 보이는 그가, 소년처럼 이런 것을 모은다는 사실은 꽤나 친분이 있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내가 자주 그와 어울렸으니 아는 거지.

갖은 노력 덕분에, 나는 이번에 출시된 페코짱, 포코짱을 간신히 구했다.

나는 그것을 예쁘게 포장한 다음, 그에게 건네주었다.

“어… 나에게 왜 이걸 주는 거야?”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다르게, 그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어라? 이게 아닌가?

“응, 그… 일… 때문에 고맙다고 주는 거야.”

나는 겸연쩍게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가 뭘 또 실수했나 싶어 심장이 두근대었다.

“따라와.”

갑자기 그가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이끌었다.

(7)

“나보고 책임지란 뜻이지?”

“어… 어?”

A군은 나를 테라스에 데려갔다. 다행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 바보 같은 얼굴을 모두가 보았을 것이다.

“왜 모른 척해? 이걸 나에게 줬다는 것은 그런 의미 아니야?”

그는 그러면서 나에게 내가 준 베어브릭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아차 싶었다.

나는 선물을 구하는 것에만 신경 쓰는 바람에, 내용물에 대해서는 자세히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것은 웨딩버전이었던 것이다!

“네 사정 때문에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알겠어. 그런데 나는 여자의 과거 따윈 묻지 않는 타입이거든? 그러니까 내가 말해줄게. 나랑 사귀자.”

삐용삐용. 응급상황이다! 머릿속에서 엠뷸런스 100대가 지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어찌할 줄 몰라서 얼굴만 붉힌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다시금 끄덕였다.

“딱 이틀 줄게. 그때까진 답을 줘.”

A군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떠났다.

(8)

결국 그날은 하루 종일 아무 답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머리가 멍해져 아무 생각도 안 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자? 여자? 그런데… 이래도 괜찮나? 친구랑?

여러 가지 상념이 복잡하게 뒤엉켜서, 제대로 된 문장조차 떠올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그가 준 이틀 중의 하루를 아무 소득 없이 낭비해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난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안된다고 하자.

‘우린 친구 사이일 뿐이고, 나는 아직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어.’

나는 양치를 하며 그 문장을 수십 번 되뇌었다. 그런데 출근해서 그를 본 순간, 그런 생각 따위는 눈 녹듯 사르르 녹아버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지금까지 그를 이성으로 생각한 순간은 단 1초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를 보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일하는 내내 그 상태가 지속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9)

신체 변화는 감정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감정이란 것이 이렇게 섬세하고 복잡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자들이 그렇게 힘들어했던지도.

하지만 그건 그거고, 어찌 되었든 간에 그에게 답은 주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틀째 날의 아침이 밝아왔다.

나는 전쟁에 출전하는 기사처럼 옷을 신경 써서 입었다. 그것이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며.

오전에 그와 나는 서로 힐긋힐긋 쳐다만 볼 뿐,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후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 식으로 퇴근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대치 상태는 계속되었다.

“이따가 끝나고 한잔 콜?”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내 쪽이었다. 여기서도 회피해버리면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ㅇㅇㄱ”

남들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사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메시지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퇴근하자마자 즐겨 찾던 역삼역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10)

삼겹살집을 고른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여자가 되었다고 갑자기 점잔 빼면서 호텔로 가기는 싫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회사 이야기를 하며 밥을 먹었다.

“그 부장 진짜 좀 그렇지 않아?”

“응, 그가 내 몸을 훑어볼 때는 소름이 끼친다니까!”

우리는 적당히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마음 한쪽에 ‘그것’이 추처럼 매달려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좀 생각해 봤어?”

결국 그것을 견디지 못한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그 말에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남자라면 참을 줄도 알아줄래?”

내 말에 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섰다.

“좀 걷자.”

내가 말했다. 우리는 천천히 길을 따라 걸어갔다.

“어! 눈이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눈 한 송이가 내 손에 하늘거리며 떨어졌다. 그것은 순식간에 녹았으나, 별 상관없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으니까.

(11)

A군은 눈이 와서 추운지, 손을 비비며 입김을 불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는 가방에서 목도리를 꺼냈다.

“따뜻할 거야.”

나는 그것을 그에게 둘러주었다. 그러자 그가 눈이 동그래졌다.

“A군, 나를 지켜줄 수 있어?”

나는 목도리를 여미며 그에게 말했다.

“어?”

그는 갑자기 그런 말을 들을 거란 생각하지 못했는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남들의 시선과 사회적 압력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수 있냐고.”

그제야 A군은 내 말의 의미가 뭔지 깨달은 듯했다.

“그럼, 당연하지!”

“그래.”

그의 말에, 나는 미소 지었다. 내가 목도리를 매어 주고 나자,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앞으로도 상황은 좋지 않을 것이다. 여자로서의 삶은 만만치 않게 힘들 테니까.

하지만 옆에 누군가 있어 준다면 그런 것들은 단순한 장애물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눈이 오는 길을 서로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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